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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선도하는 부자는 따로 있다 경제

한국은 여전히 변화가 중심이다. 한국은 평균이 급속히 올라간 치열한 확장기를 거쳐 이제 다시 안정 괘도에 들어설 것이다. 이때 그것이 좌이던 우이던 그것이 역사의 선택이라면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일지 모른다. 중간값이 어디냐에 따라서 당신의 재테크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환경 문제가 뜨거운 화두가 될 때마다 우리는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 새만금을 지키기 위해 김용옥 교수가 포크레인 위에 올라가서 일인 시위를 하는 모습은 지식인의 의무일 수 있고, 천성산 도룡뇽을 지키기 위해서 지율 스님이 목숨을 건 단식을 하는 것도 생명을 중시하는 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더 크게 본다면 어떤 역설이 성립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가 동경하는 자연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5천만 인구가 산으로 들어가서 통나무집을 짓고 땔감을 태워 난방을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또 5천만 인구 모두가 농약을 치지 않은 유기농 농산물만 고집한다면 어떻게 될까? 또 공해를 없애기 위해 모든 화학공장을 폐기 처분하고, 원자력발전소를 없애고, 기름을 때는 화력발전소를 풍력이나 수력발전으로 돌리면 어떻게 될까? 그때 그 많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수원은 어디서 감당하고, 그 많은 사람들이 입을 옷과 연료와 식량은 어떻게 될까?

또 우리가 「홍도의 자연」이라는 수필에서 물동이를 이고 지나가던 아낙의 정취가 사라짐을 탄식하는 것과 홍도에서 사는 주민의 입장은 어떤 차이가 날 까? 아름답던 산천은 가든과 모텔로 가득 차고, 삼천리 강산의 허리가 고속도로로 잘려나간 것은 과연 인간이 더 가지려는 단순한 이기심 때문일까? 아니면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기 위한 인간 자체의 자기 노력일까?

동물의 세계에서 개체가 증가하면 스스로 개체를 줄이지만 인간은 스스로 개체를 줄이기보다는 자신의 영역을 확대하고 홀로 살아 남기 위해 지속적인 파괴를 행한다. 그러나 만약 이 문제를 인간 역시 아직은 스스로 개체를 줄일 수밖에 없는 시기까지 도달하지 않았을 뿐 언젠가 인간 역시 한계에 이르면 스스로 개체를 줄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인간이 먹이사슬의 최상층부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가장 느릴 뿐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어떤 해석이 가능할까? 만약 이 역설이 성립한다면 지금 환경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은 시대착오적일까?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늘어나는 개체 수를 감당하기 위해 먹이사슬의 최상층부에 있는 역량을 총동원해서 지금 파국을 향해 가고 있지만, 이렇게 제동을 거는 사람들이 존재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속도를 조절하면서 파국을 면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 개념은 고정관념이다. 예를 들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인구론’은 이미 오류임이 증명됐다. 지난 세기 인구는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오히려 더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과거 인류는 기아가 가장 큰 고민이었지만 지금은 기아가 큰 문제가 되는 나라는 일부 국가로 국한되고 있다.

지금 방글라데시와 아프리카의 기아는 중세 유럽이나 가까이 우리나라의 기근과 비교할 만하고, 유토피아가 쓰여질 무렵 감자 한 개를 훔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던 처절한 상황에는 이르지 못할지도 모른다. 30년 전 석탄의 고갈이 사회적 문제였지만 지금은 석탄의 고갈보다는 석유 자원의 고갈이 더 문제가 되고 있다. 석유자원 역시 이미 예상 고갈 시점을 넘어섰지만 연간 석유 생산량은 더욱 증가하고 있다. 인간은 필요에 의해 석탄에서 석유로 산업을 변화시켰고 고갈이 예상되던 시점의 석유의 매장량은 탐사 기술의 발달로 지난 10년간 몇 배로 늘어났다. 더불어 채굴 기술의 발달로 인해 생산량을 급격히 증가시켰다.

더구나 이런 식의 확장 논리는 소수의 선각자들에 의해 제동이 걸리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한다. 경제 행위도 마찬가지다. 역사적 자각을 바탕에 둔 큰 눈으로 인간을 살피고, 시야를 좁혀 경제 전반을 관조하고, 다시 돋보기를 들이대서 돈을 바라본다면 지금 우리가 다루는 돈이라는 주제도 나름 얼마든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인간의 모든 것은 평균값에 의해 결정

돈은 천박한 것이고, 상업은 저급한 것이라는 인식은 편협하다. 돈은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며, 돈의 흐름은 곧 스스로 얼마나 가치를 부여받는가에 관한 척도이다.

과거 돈이란 노동력의 대가이고, 그것을 사고파는 것은 천박한 일이라는 사고는 무형의 가치를 사는 행위 역시 가장 인간다운 행위라는 인식의 전환도 필요하다. 시대는 변한다. 원본의 시대, 복제의 시대를 거쳐 지금은 상징의 시대에 와 있다. 우리는 화폐라는 이름으로 인쇄된 숫자와 모양이 지시하는 크기만큼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으로 노동력을 사고판다

 

하지만 그것 역시 지금은 계좌라는 이름으로 컴퓨터에 나타나는 숫자로 가치를 규정하고 그것의 총량으로 삶과 죽음의 딜레마에 빠지기도 한다. 공장은 주권으로 대체되고, 이 주권은 한번도 실체를 보여주지 않은 채 은행에서 이체된 또 다른 수치로 사고팔 수 있다. 인간이 언제부터인가 노동을, 혹은 그 생산품을 금이나 은과 같은 불변하는 금속으로 대체하기로 약속한 다음부터, 그것을 구리로, 합금으로, 다시 종이로, 그리고 컴퓨터상의 신호로 대체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자산을 거래하고 자산을 주고받기에 점점 쉬운 구조로 진화했다. 사실 한 인간의 실제 가치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언젠가부터 계좌에 찍히는 숫자의 크기만큼 가치를 규정지었고, 또 그 가치를 거래하면서 불평등이 심화됐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불평등은 가치를 거래하면서부터 시작된 일이고 우리가 가치를 높이는 수단은 기본적으로 이 거래관계를 이해하고 내게 유리한 거래를 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그렇다면 유리한 거래를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거래의 기본은 적정 가치를 평가하는 눈이다. 상거래란 적정 가치를 주고받는 행위가 아니라 저평가된 것을 싸게 사서 제값, 혹은 고평가된 가격으로 판매하는 것인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내가 산 가격 이상으로 누군가가 사줄 수 있는가라는 점에 핵심요소가 있다. 팔려고 하는 사람은 항상 내가 산 가격 이상으로 누군가가 사줄 것이라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팔려고 할 것이다.

사려는 사람은 특별한 예외가 없는 한 더 이상 비싼 값으로 팔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때문에 이 둘의 판단에서 가장 실패할 확률이 낮은 가격이 적정 가격으로 작용하고, 서로 위험을 부담하지 않기 위해서는 평균 가격을 의식하게 된다. 거래는 항상 평균 가격을 중심으로 정규분포를 보이게 된다. 이때 거래가 중심에 몰려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중심 부근에서 사고팔 경우 내가 이것을 지나치게 낮거나 높은 가격에 거래하지 않을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이고,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이익은 커지지만 반대로 그것을 사거나 팔아줄 사람을 만날 확률이 낮아지는 것이다.

이런 ‘평균회귀심리’는 비단 거래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행동의 바탕에 깔려 있다. 사람이 하는 거의 대부분의 결정은 평균값에 수렴한다. 평균값에서 멀어질수록 그 결정은 오류가 될 가능성이 크고, 평균값에 가까워질수록 손실과 이익의 수준은 낮아진다. 때문에 대부분의 보통 사람은 이렇게 평균에 수렴하는 생각을 가짐으로써 평균으로 살아가고, 소수의 사람은 평균에서 멀어짐으로써 물줄기를 새로운 방향으로 돌리거나 아니면 실패한다. 이때 이 사람은 선각자 이거나 소외자이다. 이점은 경제뿐 아니라 정치 사회적인 모든 인간의 행위를 규정하는 원리다.

블루오션=평균이 이동하는 길목에 미리 자리 잡는 것

사실 부자가 되는 길은 여기에 있다. 최근 유행하는 ‘블루오션 전략’이란 이 개념과 일맥상통하지만 사실 이것은 지나치게 관념적이다. 이익이 나는 곳에 여러 사람이 뛰어들어 레드오션이 된 시장에서 살아남기보다 블루오션을 개척하라고 말하지만, 블루오션이란 평균이 이동하는 길목에 미리 자리를 잡는 데 성공한 사안에 대한 결과적인 논리다. 우리가 블루오션이라고 칭송하는 사례들은 레드오션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진화를 거듭한 결과이거나, 새로운 추세를 감지하고 미리 준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LG전자가 초콜릿폰을 만들어 성공한 것은 추세 내에서의 변화일 뿐 진정한 의미에서 블루오션이 아니다. 애플이 아이포드를 개발해서 성공한 것도 블루오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추세 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성공일 뿐이다. 진정한 의미의 블루오션이란 과거 텔넷의 시대에서 월드와이드웹(www)의 시대를 예견한 사람, 호출기의 등장을 두고 이동전화를 준비한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당신이 은퇴 이후나 노후를 준비하는 단순한 재테크를 꿈꾼다면 이 글은 건너뛰어라.

그러나 당신이 정말 부자로 자리매김하고 싶다면 다른 글을 덮고 이 글만 읽어도 좋다. 당신이 지금 주식 투자를 하거나, 혹은 부동산에 투자하거나 기업을 하거나 벤처를 하든, 당신이 도달할 길은 이미 정해져 있다. 당신이 평균이 허락하는 범주에서 안주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부동산으로 혹은 주식으로 혹은 기업으로 돈을 조금 벌 수 있을지는 몰라도, 당신이 재벌 2세가 아닌 이상 시대를 선도하는 부자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당신이 부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것은 평균이 허용하는 레인지와 그것을 벗어나는 경계를 보는 눈이 있어야 하고, 평균의 레인지를 벗어난 움직임이 일탈인지 추세의 변화인지를 해석하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은 항상 평균에 서 있으면서 평균이 무엇인지를 늘 파악해야 한다.

평균 레인지를 파악하는 당신에게 일탈의 조짐이 보일 때 그 일탈이 평균으로 회귀하는 단순한 일탈인지 아니면 그것이 평균 자체를 돌려세우는 변화인지를 간파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이것을 수학적으로 이야기한다면 평균과 표준편차의 개념이 될 것이다. 좀더 수학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인간의 행동은 정규분포곡선를 이루고 정규분포에서 편차 1.5 수준은 허용 가능한 범위다.

예를 들어 광화문에 광고용 전광판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실시간 뉴스나 중계방송을 전하는 것을 보고 당신이 친구들과 함께 광화문 네거리에 모여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응원을 했다고 가정하자. 그것은 지나는 행인으로부터 일탈로 취급받을 것이며 당신은 너무 서두른 것이다. 그러다가 일단의 젊은이들이 그 자리에 모여 축구 경기를 같이 관람하면서 직접 운동장에 나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는 모습을 보면서 조만간 젊은이들의 집단 관람이 추세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훌륭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은 평균을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가장이 축구를 보려고 거실에 나와 텔레비전를 켜고 아내는 안방에서 드라마를 보는 환경에서 그것은 단지 정규분포의 편차를 벗어나는 소수 일탈에 불과하다.

그러나 집집마다 온 가족이 모여 새벽까지 함성을 지르고 축구 경기가 열리면 아파트마다 고함소리가 새벽 공기를 가르는 순간 광화문 네거리에 모인 청년들의 무리는 일탈이 아니라 자칫하면 평균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시그널이라는 점을 알았다면 당신은 현명하다. 이때 “멀쩡한 집 놔두고 길거리에서 왜 소란이냐”는 반응을 보인 당신은 이 분포에서는 ‘메디안값’ 즉 정확히 평균을 살고 있는 보통 사람의 안목이다.

이러한 당신의 안목은 당신을 평생 지금의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게 옭아매는 올가미가 될 것이다. 그리고 월드컵이 열리고 광화문 네거리에 모여든 인파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울렁이기 시작한다.

분산된 평균은 안주하지만 길거리에 모여든 군중의 집약적인 에너지는 평균에 서서히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길거리 군중이 늘어나고 길거리에 모이지 못한 사람들은 카페나 다방에 모이고, 가정에서 TV를 보던 사람들도 함께 모여 같이 축구를 보기 시작하면 이것은 이미 평균을 움직인 새로운 물줄기가 형성된 것이다. 이때 당신이 현명한 정치인이라면 어떤 판단을 했어야 하는가?

대중은 정규분포의 꼭지점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은 항상 분산적이다. 그러나 대중의 정서가 좌측으로 쏠리기 시작하면 밀도가 높아진다. 정규분포곡선의 중심에서 좌측으로 이동할수록 공간은 좁아지고 밀도는 증가한다.

그 힘은 폭발적이고 대중의 분산이 대중의 밀집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간파한 당신은 안목이 있는 정치인이다. 그리고 연이어 효순이와 미선이가 미군의 장갑차에 치어 사망한 뒤 각 도시를 뒤덮은 촛불시위의 물결을 보면서 아직도 대중의 밀집을 간과했다면 당신은 이미 줄을 잘못 선 것이고, 대중의 힘을 간파한 당신이 노사모를 만들고 대중에게 승부를 건 노무현에게 배팅을 했다면 당신의 정치적 안목은 정확하다.

시대적 변화에 따라 재테크 방식도 달라져

이런 시대적 변화는 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보수는 현재의 평균을 지키려는 사람, 수구는 과거의 평균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 진보는 새로운 평균을 만들려는 사람이다. 이것이 경제적 입장에 투영된다면 클린턴이 집권하고 아칸소의 촌놈들이 새로운 리더십을 들고 나오는 순간 이미 기존의 자본가들에게는 재앙적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새로운 리더십은 직전의 리더십이 기반한 곳에 둥지를 틀지 않는다. 신흥 리더십은 기존의 자본들을 가능한 한 배제하고 새로운 자본의 형성을 갈망한다. 이때는 소위 성장산업이 등장하고 새로운 산업이 전면에 부상한다. 벤처라는 이름의 신흥자본들이 득세하고 이들은 순식간에 기존 자본가들의 아성을 위협한다.

한국에서는 국민의 정부가 같은 역할을 맡았다. 이들은 과거 그들의 적을 지원하던 기성 자본보다는 새로운 자본 형성을 후원하고 지지한다. 세계적으로 강력한 변화가 시작되고 산업은 급속하게 재편된다. 그러나 그 다음 시기에 부시정권이 집권하면서 양상은 달라진다. 전통적인 자본가들이 다시 반격의 기회를 잡는다. 석유, 군수, 유틸리티, 운송과 같은 기존의 자본가들이 정치권력을 후원할 기회를 잡고 이들은 다시 한번 날개를 펼친다. 그리고 직전에 등장한 화려한 신흥자본은 강력한 후원자가 사라지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아야하는 혹독한 시련이 기다린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변화가 중심이 되지만 그것은 한계에 부딪친다. 신흥자본에 대한 과도한 지원은 곳곳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전통산업이 복구할 기회를 맞이한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은 평균이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 미국과 다르다. 미국은 좌로 움직인 평균이 우로 다시 이동하면서 좌우의 균형이 다시 중심으로 돌아왔지만 한국은 여전히 평균이 이동하는 중이다. 다만 과거처럼 무조건적인 지원은 사라졌다.

그렇다면 다음은 어떻게 될까? 정립과 반정립의 역사적 순환고리는 지금 움직이고 있는 평균을 고정하는 힘으로 작용할 것이다. 미국은 다시 좌우의 균형이 필요하고, 한국은 평균이 급속히 올라간 치열한 확장기를 거쳐 이제 다시 안정 괘도에 들어설 것이다. 이때 그것이 좌이던 우이던 그것이 역사의 선택이라면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일지 모른다.

이때의 안정 괘도가 지금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평균의 방향을 정지시키든, 혹은 다시 과거의 평균으로 회귀하든 더 이상의 빠른 속도를 유지하기에는 힘에 부칠 것이다. 편차가 확대된 상황에서 산만하게 퍼져 있는 상황은 조만간 다시 정규분포 안으로 들어올 것이고 이때의 중간값이 어디냐에 따라 질서는 재편될 것이다. 이때 경제적 영향은 어떨까?

대중이 앞으로 어떤 방향성을 가지는지는 이것을 이해하는 가늠자다. 만약 평균의 이동이 지금처럼 계속된다면 기존의 질서는 완전히 재편되고 환경, 건강, 복지 쪽으로 질서가 재편될 것이다. 이때는 여전히 당신이 가능성만으로 승부할 수 있고 당신의 능력을 기업에 거래하기보다는 차라리 스스로의 능력을 무한대로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옳다.

당신의 자산 관리나 투자도 무작정 돈을 버는 방식보다는 노후를 대비하고 우아한 은퇴를 준비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 현명하다.그러나 만약 반작용으로 평균이 다시 과거의 방향으로 회귀한다면 당신은 기업에 당신의 능력을 맡기고 당신이 운영하는 벤처나 당신이 꿈꾸는 사업들은 가능하면 기존의 질서 속으로 편입하는 것이 좋다.

이것은 정치적 질서가 경제를 구속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추세를 파악하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다. 역사는 그렇게 진화해왔고 당신이 서 있는 이 순간은 단지 그 역사속의 한 장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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