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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철학에 관하여 경제

세상의 어지간한 일에는 나름대로 철학이 끼어들 여지가 있다,


철학이란, 우리가 ‘지식에 대한 사랑’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따르건, 혹은 ‘현상에 대한 이치를 밝혀서 그것을 관통하는 통찰을 참구한다’는 현학적인 주장을 따르건 간에, 나름대로 역사성을 가진 삶과 행위의 제 분야에는 그 자체로서 자연스레 철학이 성립 할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미 수 백, 수 천년을 이어온 다양한 투자행위에 관한 철학도 없을 수가 없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일상에서 너무도 당연하게 ‘투자철학’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예를들면 ‘당신의 투자 철학은 무엇입니까?’ 혹은 ‘건강한 투자 철학을 가지십시오’라는 말들이 거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의 투자 철학은 무엇입니까? 라고 필자가 물었을 때 어떻게 대답하실지 참 궁금해진다.

 

만약 어느 분이 ‘내 투자철학은 우량주 장기투자야’ 하고 답하고, 또 다른 분은 ‘ 나는 모멘텀 투자가 최고라고 믿어’라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이리석은 질문에 틀린 대답을 한 우문우답(愚問愚答)이 된다. 즉 이 두가지 대답중 하나를 들을 생각이었다면 필자의 철학이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은 ‘당신이 신뢰하는 투자수단은 무엇입니까?’로 대치되었어야 했고, 독자 역시 그렇게 답변하실 요량이시라면 ‘ 대체 그딴 질문이 어딨어?’ 하고 말 했어야 옳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 스스로 투자철학이라고 칭하는 ‘개념’이 실제 담론으로서의 철학(哲學)이 아니라, ‘투자의 습관이나 스타일’에 대해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였을 뿐이라는 사실을 잘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언젠가 담론으로서의 ‘투자철학’을 이야기하려면, 우리는 먼저 지금까지 ‘투자철학’이라는 담론을 한 번도 가져 본적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다음 순서는 왜 법철학, 의학철학, 정치철학, 과학철학, 예술철학등 시간성이 존재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 철학이 존재하는데 ‘투자철학’은 왜 성립하지 않았는가? 라는 의문을 가지는 것이다.


철학은 ‘왜 그럴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왜 죽는가?’ ‘우주는 영원한가?’ ‘말은 뜻을 모두 담을 수 있는가?’ 등등 인간이 치열하게 고민하지만 아직 답을 얻지 못하고 있는  모든 분야에는 철학이 성립한다.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가 아직 철학,혹은 신학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것은, 탄생의 비밀은 풀어졌지만 죽음 이후의 일을 증명 할 수단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이 의문이 풀려진다면 신학은 과학이 되고, 철학은 종말을 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투자행위에 대한 철학이 존재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이미 시작과 끝을 규명하고 알아냈다는 것일까?, 그것은 분명히 아니다. 투자는 인간이 고민하는 그 어떤 다른 주제들보다  치열한 고민거리이고, 고대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모든 탐욕과 절망이 담겨 있는데 철학은 성립하지 않았다. 정말 사람들은 투자는 과학으로 해석되고 증명되어 지는것이라고 믿는 것일까? 아니면 투자행위는 너무 통속적이고 천박한 것이어서 감히 담론의 영역으로 끌어 들이기에는 자존심이 상하는 때문일까?

 

이렇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투자란 철학적 통찰이 대단히 필요한 고도의 정신적 행위이다. 또 투자는 당대의 경제행위에서 가장 논리적이고, 가장 민감하며, 가장 지적인 행위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주식투자의 예를들면 주식투자 행위 그 자체는 지극히 포스트모던한 행위에 속한다.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한 번도 자신이 보유한 주권이라는 것을 본 적도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실물을 한번도 본 적조차 없는 이 주권이라는 것을 대상으로 가격을 정하고 그 가격을 사고 판다, 주식거래란 판 사람과 산 사람의 거래 행위에서 실물주권은 이동하지 않고 그 주권에 대한 권리만 확보(Deposit) 되는 것이다. 더구나 이 주권이 거래되는 과정에 필요한 화폐는 통장의 계좌에 찍힌 수자를 컴퓨터상에서 계상하고, 버턴 하나로 가격을 지불하며, 또 지급받는다,

 

그나마 주권이라는 실체가 존재하는 주식시장의 경우는 행위의 대상이 존재 한다고 가정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을 미래의 특정 시점에 인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사고파는 파생시장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아무런 실체도 존재하지 않는 무형의 가치를 거래한다.


금융시장은 불가사리처럼 자가증식을 한다,

 

처음에는 주권을 사고 팔다가, 시장이 커지면 그것을 살 수 있는 권리를 입도선매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면 옵션에, 개별 옵션까지 만들어 낸다, 아마 시간이 더 흐른다면 옵션 거래를 다시 사고파는 옵션의 옵션이 만들어 질 것이고, 좀 더 시간이 흐르면 지금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희안한 권리들이 만들어지고 거래 될 것이다. 당장 최근 등장한 ELW.ETF 등의 경우 역시 그 성격을 규정하기가 대단히 모호하다,

 

왜 그럴까?

 

원인은 결국 광의의 의미에서 인플레이션 때문이다,


넓은 의미에서 인플레이션이란 인류가 자연에 작용을 가하여 생산한 생산물이 누적되는 것이다,

 

즉 단순한 철광석, 구리, 원유등의 자연상태의 요소가 점차 2차 3차 가공을 거치면서 부가가치가 증가하는 것이 인플레이션이라고 본다면, 그것을 거래하는 시장의 규모도 덩달아 인플에이션이 발생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렇게 부가가치를 부여한 생산물을 거래하는 것은 오히려 그 이전보다 더 수월해 졌다. 과거에 철과 구리를 거래하거나 쌀을 거래하기 위해서는 실물자산을 들고 시장에서 매수자와 매도자가 만나서 거래를 해야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상업거래에서 ‘신용’이 정착하면서 우리는 실물을 주고 받지 않고 실물을 증거하는 서류만으로 그것을 거래한다, 이렇게 실물을 대체하는 증서가 생김으로서 시장은 훨씬 많은 거래를 쉽게 수행하게 되었다. 


아무리 부가가치가 커지더라도, 결국 거래는 매도와 매수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업과 금융은 왜 위축되지 않을까?. 예를들어 쌀 100 가마를 거래하려면 엄청난 인부와 돈, 그리고 장부가 필요한 세상에서, 이제는 단지 기호로 된 컴퓨터 신호로 모든 것이 마무리되는 세상으로 바뀌었는데 왜 상업은 종사자가 계속 늘어나고 나중에는 실물의 부가가치가 증가하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이제는 2차, 산업을 뛰어넘는 새로운 산업으로까지 몸집을 키우게 된 것일까?


그것은 인간이 자연에 작용을 가하여 부가가치를 높이는 것 처럼, 거래 행위도 스스로 부가가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증식을 하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예전에는 쌀을 구매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실 수요자들이고 쌀이 생산자에게서 소비자까지 전달되는 데는 불과 서너번의 거래행위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지금은 그 과정이 백번, 천번, 심지어는 만번을 되풀이 하기 때문이다.

 

상업은, 혹은 금융이나 투자산업은 계약서 하나로 지구전체를 거래 할 수도 있지만, 대신 그 거래된 계약서를 계속 반복하여 거래하면서 그 과정에서 하나의 새로운 부가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투자시장은 점차 복잡한 거래기법과 상품을 지속적으로 생산하게 된다. 거래는 더 많이 이루어지고, 매매의 대상을 두고 셀 수 없는 거래방법을 개발하고 그것이 반복과 재포장을 거듭하면서 점점 시장팽창의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인류는 자연의 생산물을 지속적으로 가공하고 부가가치를 높이지만, 부가가치를 높이는 것은 생산물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래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거래의 부가가치를 높이려고 고민하고 그 결과 금융상품은 진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금융도 거리의 빌딩과 교량이 증가하는 만큼 점점 진화하게되고, 그 결과 오늘날의 금융상품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금융공학은 투자자들이 시장을 좀 더 잘 이해하고 컨트롤하기 위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금융상품이 스스로 부가가치를 만들어 가는 하나의 생산과정에 필요한 도구이다.


그래서 우리가 행하는 투자행위는 포스트모던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원본은 점점 위축되고, 원본을 복제한 투자시장이라는 가상현실의 세계는 점점 비중이 커진다,

 

그런 점에서 주식시장에서 주권 거래보다 선물옵션및 기타 파상상품의 비중이 더 커지는 것은 과정의 일부 일 뿐이다. 그래서 필자는 주식시장을 고도의 철학적 사유가 필요한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아울러 철학이 성립하지 않은 이유는 이제 단순해진다. 그것은 우리가 금융공학이라는 수단을 통해 금융기법들을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하면서 이러한 모든 과정들이 과학적으로 통제가능하다고 우리가 믿기 때문이다.  과학이 지배하는 영역에는 철학이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광고카피는 '투자는 과학이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가 만들어 낸 상품에 대한 통제와 생산이 그것을 거래하는 사람들의 충동을 통제하고 예측가능한 범주에 가두어 두는데 성공 할 수 있을까? 네델란드의 튤립에서 최근 IT 거품국면까지 과거 우리가 경험한 비이성적 시장들은 그동안 금융공학이 본격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이제는 비로소 점점 그것이 가능하고 통제 될 수 있는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일까?

 

그래서 앞으로는 우리가 예측 할 수 없는 황당한 투기국면을 경험하지 많을 것이고, 모든 시장은 적정가치를 판단하는 함수와 방정식에 의해 설명되어 질 수 있을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시장이 인간의 감정을 통제하고 실제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바로 시장의 종말이다. 가격이란 매수자는 싸다고 믿고, 매도자는 비싸다고 믿기 때문에 형성되는 것이며, 이 상반된 두 의견이 스파크를 일으킨  것을 가격이라 부르는 한 , 그것이 통제된다면 금융시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금융시스템은 아무리 진화해도 가격이 존재하지 않는 한 무용지물이다, 더욱이 가격은 항상 시장의 의견이 절반으로 나뉘어 서로 대치하는 것을 상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어떠한 긍융공학이나 수학도 그것을 예견하거나 적정가격을 도출 할 수 없다.


이제 주제를 좀 더 확장해보자. 


주식시장에서 적정가격을 주장하는 방식은 많다,

 

그것은 때로는 가치분석, 때로는 펀드멘털 분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것의 이면에는 결국 가격형성에서 심리적 요인이 가장 크다는 전제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필자는 가끔 시장 분석가들이 확신에 찬 주장을 때 마다 당혹스럽고 걱정스러운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어떤 분석가는 기업의 수익을, 어떤 분석가는 자산가치를, 또 어떤 분석가는 배당을, 또 어떤 분석가는 이익증가율을, 또 누구는 챠트 분석에 근거한 모멘텀을 ,또 누구는 그것을 조합해서 방정식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저평가와 고평가를, 혹은 매수와 매도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과연 기업의 실적이나 가치를, 혹은 챠트상으 지지선과 저항선을 주가의 가늠자라고 믿는 생각에 오류는 없을까?

 

예를들어 어떤 기업의 주가수익배율이 20 이라고 하자, 이때 주가수익배율의 전체시장 평균은 10 이라고 하자 ( 현재 한국시장의 대형주와 소형주의 평균 주가수익배율이다 ) 이때, 두 가지 관점이 존재 할 수 있다, 먼저 가장 합리적인 생각은 대형주가 저평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소형주가 20 인데 대형주가 지나치게 낮으므로 이것은 대형주의 매수 기회이고 소형주는 고평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지금 시장의 다수전망은 중소형 주의 추가 상승에 기울어 있다, 이때 이런 의견의 바탕은 과거 중소형주의 평균 PER 밴드를 보면 최대 30 까지는 상승 할 수 있다는 것이고, 여기에 비하면 아직 50%의 상승여력은 충분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대형주에 비해 지나친 고평가가 있다고 평가 할 것이고. 이 의견에 콧방귀를 뀔 것이다.

 

누구 말이 맞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지 시장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 주장에는 대단한 맹점이 있다, 만약 중소형주의 추가상승이 가능하더라도 이 주장의 핵심 근거는 ‘과거에 비해’라는 전제이다, 즉 ‘과거에 비해’라는 것은 그 분석가가 이미 가격변화를 중심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지, 분석가가 주장하는 것처럼 기업의 내재가치를 본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내재가치라는 이름을 붙인 기술적 분석을 행하고 있었던 것 뿐이다,


또 반대의견으로 대형주의 PER 이 10인데 이제는 상승 할 것이라는 논지를 보면, 과거 대형주의 평균 PER 밴드가 8-12 이므로 이제 20%의 상승이 가능 할 것이다는 해석도, 반대로 20%가 하락 할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때 상승쪽으로 주장하는 논거는 무엇이 될까? 아마 그중의 백에 99명은 미국시장의 PER 은 15를 넘고 대만이나 다른 신흥국도 12는 되는데 우리만 지나치게 낮으므로 상승 할 것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주장 할 것이다,

 

하지만 이때 ‘대만이나, 다른 나라에 비해’라는 말 역시 이미 가격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기업의 내재가치를 정확히 반영하는 지표가 존재한다면, 또 진짜 ‘분석’이라는 이름으로 적정가를 도출 할 수 있다면 ‘역사적으로 볼 때’라는 이름으로 과거와 비교하는 행위는 이미 불필요 한 수식어이며, 다른나라, 혹은 과거, 혹은 대형주와 소형주의 비교와 같은 기준은 그야말로 구상유취 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점에서 본다면 지금 유행하는 가치투자에 대한 지나친 믿음도 일부 우려스러운 점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기본적으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가치투자의 방식은 역설적으로 대단히 기술적 분석의 입장에 서 있다. 즉 시장이 어떤 기준으로 볼 때 다른 종목보다 저평가 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것이 반드시 제 가치를 찾아 갈 것이라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특정기준에서( 그것이 순자산이건, 순이익이건간에 ) 적정수치와 괴리가 있다면, 또 그 괴리를 좁히는 것이 필수적인 것이라 믿어야 할 것이다.


이때 소위 마바라라고 불리는 대개의 어리석은 투자자들이 만원짜리와 오천원짜리 주식이 언젠가는 같은 가격을 이룰 것이라고 믿을 때, 가치 투자자,혹은 그것을 표방하는 분석가들은 ‘가격이 아니라 가치가 제 자리를 찾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전제 역시 옳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가치가 제 자리를 찾는 방식에는 낮은 가치의 기업이 가치가 상승함으로서 제대로 평가 받는 방식도 있고, 반대로 실력에 비해 높게 평가받던 기업의 가치가 아래로 내려와서 서로 키를 맞추는 경우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전제의 기본은 ‘시장이 전체적으로 유동성이 유지되거나 증가하고, 시장 가치가 전반적으로 우상향한다고 생각한다면, 상대적으로 저평가를 받고 있는 기업들이 고평가를 받고 있는 기업들과 키 맞추기를 할 것이다,’라는 말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냉소적으로 말한다면 지금까지 가치투자자들의 승리는 결국 장기적으로 자본시장이 지속적으로 우상향 했기 때문이지. 그들의 분석 툴이 모두 훌륭했기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어쨌건 장기전에서는 가치투자자들의 (가치 분석의 방식이) 모델이 주식 투자에서 전반적으로 이익을 낸 것은 분명하지만, 이 역시 또 하나의 문제를 안고 있다.


거래의 기본은 이익을 최대한 취하는 것이다,

 

그런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과연 ‘제 가치’를 되찾기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한가지 방식만을 고집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예를들어 지난 1997-2000년 사이의 성장주 랠리에서 소위 가치 투자적 방법론들은 이익을 내지 못하거나 혹은 손해를 보는 국면이 전개되었다. 이때 성장주에 투자한 사람들이 수 십배의 이익에 희희낙락 할 때 이방식은 시장에서 소외되었고, 심지어는 전설적 투자자인 워랜버핏 마져도 이제 그의 시대는 갔다는 조롱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3년 후 두 입장은 다시 역전이 되면서. 2000년 이후 성장주에 투자한 사람들은 쪽박을 찼고, 가치투자를 믿던 투자자들은 극적으로 회생했다, 그리고 가치투자의 승리를 외쳤다.


하지만 시장 논리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새로운 산업이 열리고, 유동성이 급증하고, 곳곳에 푸른바다가 넘실거리는데, 여전히 붉은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언젠가는 나의 시대가 온다고 와신상담하는 것만이 과연 옳은 것일까? 또 성장주에 투자했던 사람들이 그 푸른바다가 서서히 붉게 물들어 가는 것을 보지 못하고, 단호히 항해를 멈추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은 단순한 과오였을 뿐일까?


이것이 바로 투자철학이 필요한 두 번째 이유이다.


시장은 통찰을 필요로하고 깊고 세련된 직관을 필요로 한다,

 

통찰의 바탕위에서 자신이 항해하는 바다가 푸른색인지 붉은 색인지. 수심은 어떤지를 살피면서 비로소 계기판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투자란 수학적 분석과 비교대상을 찾는 리서치 못지않게, 전체를 조망하고 변화의 기류를 살피며 통찰적 안목을 기르는데 주력해야한다. 그래야 투자시장에서 진정한 승자가 되고, 언젠가 미래의 어느국면에서 모멘텀 투기자들이나, 가치 투자자들이 공멸 할 수 있는 위기가 닥치더라도, 유유히 시장에서 발을 빼고 성과물을 보존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유명 과학자가 이렇게 말했다.

 

‘Research is not research, it's a new search’


그렇다, 투자 역시 그러하다. 투자는 철학이며 시장은 매트릭스다.


또 투자는 늘 새로운 것을 찾아가는 탐구 과정이다,

 

그것은 가치투자던, 모멘텀 투기던 혹은 금융공학의 방정식이던, 모든 구태의연한 생각들을 ( 대중이 모두 입을모아 그렇다고 말하는 ), 과감히 벗어던지고, 새로운 시각으로 통찰하며 내 눈앞에 보여지는 모든 것을 회의하고, 부정한 다음 ,대중의 눈이 아닌 철학자의 눈으로 살펴야하는 고도의 지적게임이며 ,좀 심하게 말하면 그것은 자산을 늘려준다는 믿음에 뛰어드는 종교이고, 그래도 그것을 도저히 알 수 없기에 그것은 곧 철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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